[#성구암쏭]감성충만 노래로 듣고 부르며 외우는 성구암송 프로젝트 [4]고전1장18절 말씀

[#성구암쏭]감성충만 노래로 듣고 부르며 외우는 성구암송 프로젝트 [4]고전1장18절 말씀

Mar 02, 2020

성구암쏭[4]고전1장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한 목사님께 십자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믿지 않는 사람이 그 목사님께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왜 저 끔찍한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고 있습니까? 저 십자가는 사형수들을 잔인하게 죽인, 일종의 사형틀과 같은 것인데 왜 저런 비참하고 끔찍한 형틀을 교회 예배당마다 걸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2천년 역사를 흘러오면서 십자가는 어느새 우리 인류에게 아무 거리낌이 없는, 아니 더 나아가 성스러움과 거룩함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는 기독교의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십자가는, 일종의 사형틀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도 당시 로마제국의 사형 방식 중에서 가장 끔찍한, 최고 극형의 사형 도구였습니다.

만일 오늘날 어느 종교가 죄수들을 사형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던 '길로틴'(단두대)이나 '전기의자' 혹은 '교수대의 밧줄'을 자기 종교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삼는다고 한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그 종교를 이상한 종교 취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이 끔찍한 십자가를 대표적인 상징으로 갖게 된 것일까요?

그 험한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 십자가 상에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그분께서 내가 받아 마땅한 그 십자가의 잔인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그 분의 그리스도 되심을 알지 못한채 그분을 욕하고, 때리고, 찌르고, 십자가에 매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미움과 죄악까지도 그 사랑으로 다 삼키시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가장 끔찍한 죄악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아 죽게 한 그 십자가가, 그분이 우리를 얼마만큼이나 사랑하셨는지를 가장 강력하게 증언해주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죽기까지, 당신의 생명을 다 내어 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에는 본적도 들어본적도 없는 그 핏빛 사랑이 이 십자가에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영광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참혹하고 끔찍한 사형틀로써의 '십자가'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라는 단어가 어찌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 아들을 죄인된 우리가 잡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움을 삼키시는 용서와 사랑으로, 그리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던 아들의 순종하심으로 죄인된 우리를 절대적인 당신의 사랑의 능력으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 믿지 않는 사람은 목사님께 이어서 또 이렇게도 말했다고 합니다.

"나 같으면 제일 힘있는 모양으로 '이 종교를 믿으면 너희가 이렇게 강해질 수 있고, 복받을 수 있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화려하고 멋진 상징물을 만들어서 그걸로 전도하겠오."

이 사람의 이 이야기도 어찌 보면 맞는 말입니다. 만일 어느 기업에서 자사의 상품을 홍보한다고 하면 그 제품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것을 내세워 광고할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교부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맘몬의 신', '힘과 전쟁의 신', '풍요와 다산의 신', '쾌락의 신' 등 인간이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내세우는 수많은 종류의 신들이 당시에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들의 특장점을 잡아서 그것을 표현하는 우상을 만들고, 각자 가장 욕망하는 것을 표방하는 신을 선택해서 섬기며 그것을 자기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의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상업적으로 최고로 융성한 도시였던만큼 돈이 많은 사람, 돈을 좇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한마디로 욕망의 도시였다는 말입니다. 배금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맘몬의 신이 최고의 우상으로 여겨지던 쾌락의 도시가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오늘의 성구암쏭 본문은 이 고린도의 교우들에게 바울이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고린도의 도시에서 복음은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강한 힘과 화려한 치장으로 서로의 능력을 자랑하는 신들이 판치는 분위기 속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사도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초라한 모습을 우리는 쉽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은 고린도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꺼려했을 것이고, 또한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서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바울은 이 '십자가의 도'만이, 이 복음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욕망이 투영되어 만든 신, 그러므로 결국 인간이 만든 가르침에 불과한 여러 우상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이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이 진리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로부터 이 땅 가운데 계시된 온전한 진리(사도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니버설 로고스가 아닌, 더 로고스)인 것임을 바울은 깊이 깨닫고 또한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만이 우리를 멸망할 길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진리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내게 가리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 신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 느껴져가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