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빌리코리아 양호세아 목사의 워십 칼럼[1]

주빌리코리아 양호세아 목사의 워십 칼럼[1]

Feb 14, 2020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로마서 강해설교 시리즈는 너무도 유명한 책입니다. 1955년부터 10월 7일부터 시작해 1968년 은퇴시까지 13년간 매 금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며 설교한 내용들을 편집해서 펴 낸 책인만큼, 이 책은 바울 사도의 로마 교우들을 향한 편지에 담긴 깊고 넓으면서 지적이고도 영적인 진리들을, 그야말로 깊고 넓게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로마서 강해를 시작할 때, 일반 강연 형식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예배의 모임 가운데 설교의 형식으로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로마서 강해의 모임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 가운데 이 교회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로마서 강해에 함께 계속 참여코자 하는 우리의 친구들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저는 주로 그들을 위해서 이 예배가 정상적으로 어떻게 운영될 것인지를 시사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모임이 '예배'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임은 예배의 한 경우입니다. 저는 예배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을 인정치 않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보통의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책이요, 하나님에 관한 책이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말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반드시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위대한 서신을 단순히 이지적으로나 학문적인 방식으로 숙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여기 이 로마서 연구를 위한 이 모임은 그러므로 예배의 한 경우이지 그저 단순한 한 강좌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단순히 인간의 지성으로만 성경을 파악하려고 하는 인본주의적 자세를 넘어, 성경을 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책이요, 하나님에 관한 책이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말하는 책'으로, 다시 말해 하늘의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거룩한 책으로 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파헤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무릎 꿇고 겸손한 한 인간으로 나아가 주의 말씀을 청종하기 원하는 영적인 겸손을 우리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공표하지 않겠습니다. 이유를 말씀 드리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 나갈 때 언제 그 일이 끝나게 될지 정확한 시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심을 압니다. 이지(이성)를 밝혀주시고 마음을 감동하여 주십니다. 저는 성경을 파헤쳐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의 감동을 받을 만반의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설교를 방송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시간표에 딱 들어맞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갑자기 설교자를 사로잡으면 그 방송 예배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저도 계획을 세워 어떤 분량으로 나누어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몇가지 요점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일람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리다시피, 성령께서 저와 제 아이디어들과, 제가 세울 수 있는 어떤 작은 프로그램을 위압적으로 지워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야 저는 매 주간마다 그 성령의 인도와 지도하심을 의뢰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금요일마다 얼마만큼 강해해 나갈 것인지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글에 담겨진 그의 자세를 통해서 그가 단지 지성적으로 뛰어난 설교자요 강해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령의 일하심 앞에 겸허히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뛰어난 영성을 가진 하나님의 일꾼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사역 및 찬양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저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모양은 제각각일지라도 그 본질과 중심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또 한번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그리고 기도를 통해 쓰임받는 자, 혹은 찬양을 통해 쓰임받는 자, 더 나아가서 여러 사역의 모양을 가진 자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때로는 나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체험적으로 알게되는 듯 합니다. 예배인도자로써 예배를 위해 찬양 리스트를 뽑고, 콘티를 짜고 열심히 준비를 하지만 결국 우리 예배인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다른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예비하는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것이 서투르던 시절, 처음 예배인도를 시작했을 때 생각이 나네요. 그 때는 예배인도를 잘 해보려는 나의 욕심과 의욕이 앞서서 1부터 10까지의 모든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짜놓고는, 조금이라도 내 계획에서 벗어나면 바로 표정이 찌푸려지고 이 예배는 망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더랬죠. 그럴 때면 계획에서 벗어나게 했던 여러 상황들, 예배팀의 다른 멤버들 탓을 한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내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던 인간적인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해를 거듭해 갈수록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성령께서 강하게 개입하셔서 인간적인 나의 계획이 온전히 지워질 때 더 큰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던, 지나치게 힘을 주고 있던 저를 조금씩 만져주시면서 훈련시키셔서 성령을 의지하는 법을 조금씩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돛단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과 같다고 저는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홀로 노를 저어서 힘들게 힘들게 나아가다가 이윽고 바람의 방향을 따라 돛대를 펴고 그 바람을 타며 배를 저어가는 법을 체득하는 것과 같은 모습 말이죠.


그리고 예배인도를 하면서 체득된 이 체험은 제가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신앙의 삶 자체가 나 홀로 열심히 독불장군처럼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계율들을 지켜서 나 스스로 의로워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더 깊에 체험하게 된 것이죠. 신앙의 길을 흔히 우리의 잃어버린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노정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 여정은 나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해가 지날수록 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늘 우리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시는 성령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버지께 구하는 자들은 누구나 다 성령을 은혜의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시대를(눅11:13) 지금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이 동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분의 동행하심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사도들이 행했던 그 모든 일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했던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하는 법을 알았던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기록되어있는 그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쓰는 편지에서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가 아닌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의지할까봐 심히 두려워 떨었다고 첫 고린도 사역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1-5)  


로이드 존스 목사가 성령께서 본인의 생각과 계획들을 다 지워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가진 방대한 세상의 지식과 율법의 지식이 아닌, 성령의 능력이 자기 자신을 지우고 나타나주시기를 소망하며 고린도 교우들을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은 나 자신을 가장 낮추고 비울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가장 크게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내 안에 여전히 나를 비우지 않으려는, 나를 지우지 않으려는 고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항해선의 키를 꼭 내가 쥐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고, 내 계획과 내가 예상하는 범위 안에서 모든 일들이 진행되어질 때 내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그 배의 키를 만물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운행하시는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늘 그러한 자세로 기도하며 살아가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참 평안을 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내려놓음, 전적으로 맡겨드림의 자세에 대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러한 신앙의 자세를 노예근성이라고 표현한 철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그럴 수 없는'(롬3:4)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나의 책임을 모두 성령의 책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고 나는 방만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절대 방만하게 살아질 수가 없습니다. 더욱 거룩하게, 깨끗하게 나 자신을 지키고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능력의 근원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임을 아는 자는 늘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고 큰 승리를 경험하는 자들은 늘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 믿음의 선배들이 살아갔던 삶의 모본을 따라 나를 지우고 나를 통해서 성령의 일하심이 더 크게 나타나시기를 기도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리하여서 역설적으로 더 크고 많은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